고려 시대 역사에서 성북구 지역은 당시 수도였던 개경(현재의 개성)에서 남경(현재의 서울)으로 가는 교통로로 기록되었어요. 당시 개경에서 남경으로 올 때는 문산과 양주, 의정부를 지나 현재 4호선 미아사거리역과 종암로를 거처 고려대학교 정문을 지난 다음, 신설동에서 종로로 향하는 길을 이용했지요. 즉 당시 주요 교통로가 현재 성북구의 종암동과 안암동을 지난 거예요. 그렇기에 이 교통로 주변에는 개운사, 보타사, 미타사, 보문사 등 고려 시대 사찰들이 많이 세워졌어요. 이 사찰들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답니다.
조선 후기에는 성북동에 도성을 지키는 군대인 어영청(御營廳)의 북둔(北屯)이 설치되었어요. 그리고 이 지역에 군인들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이주시켜 살도록 했어요. 하지만 당시에는 땅이 척박하고 농지가 부족했기 때문에 생계를 유지할 방법이 거의 없었어요. 따라서 나라에서는 이 지역에 ‘포백(생베나 무명 등 옷감을 삶고 빨아 볕에 말려 표백하는 것)’과 ‘훈조(콩을 삶아 메주를 쑤는 것)’를 할 수 있는 ‘포백훈조계’를 설치했어요. 이 지역 백성들은 이렇게 표백한 옷감을 도성 안의 상인들에게 팔고, 메주는 궁궐에 납품했지요. 이런 방식으로 이주한 이들이 생계를 꾸리고, 부대를 운영할 수 있도록 한 거예요.
당시 성북 지역은 농사짓기 어려운 곳이었지만 자연 경관만큼은 무척 수려했다고 해요. 이 때문에 조선 시대 많은 양반들이 이곳에 별장을 지어 생활했고, 유명한 문인과 화가들은 거처를 마련하기도 했어요. 특히 복숭아나무가 많아 행랑객들이 줄을 잇는 곳이기도 했어요. 한편으로 성북 지역은 숲이 울창했기 때문에 호랑이가 나오기도 했어요. 그래서 조선의 왕이 군대를 이끌고 이곳으로 와 호랑이 사냥에 나섰다는 이야기도 전해져요.
대표적인 조선 시대의 유적으로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정릉과 의릉을 들 수 있어요. 정릉은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으로 본래 현재의 덕수궁 일대에 조성되었다가 태종에 의해 현재의 위치로 옮겨 왔어요. 이때 정릉의 원찰(願刹,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던 법당)인 흥천사도 함께 옮겨졌지요. 의릉은 숙종과 희빈 장씨의 아들이자, 영조의 이복형인 경종과 그 부인 선의왕후 어씨의 능이에요. 의릉은 천장산을 끼고 조성되었는데, 특히 영조가 많이 찾아왔다고 해요. 또 의릉은 한 때 중앙정보부(현재 국가정보원)에 의해 크게 훼손되었다가 복원되기도 했어요. 이중 옛 중앙정보부 강당만이 의릉 내에 남아있지요.
성북구에는 조선 후기의 유적도 많아요. 장위동 부마가옥과 서울 성북동 별서, 이종석 별장 등이 대표적이지요. 장위동 부마가옥은 덕온공주의 묘 옆에 위치한 가옥으로, 순조의 넷째 딸이자 조선 시대 마지막 공주인 덕온공주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지은 재사(齋舍)이자, 덕온공주의 남편 윤의선이 살던 집이에요. 또 이종석 별장과 성북동 별서는 성북동에 위치한 유적으로 조선 시대 양반들의 별장이고요. 모두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졌어요. 또한, 흥천사의 대방, 경국사의 대각루 등 성북구 사찰 건물의 상당수도 조선 후기에 건축되었어요.
성북구에는 박물관도 많습니다. 대표적인 박물관인 간송미술관에는 훈민정음 해례본, 청자 삼각운학문 매병으로 대표되는 도자기, 김홍도, 신윤복, 장승업 등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들의 그림, 불상 등 수십 점의 문화재가 있어요. 이밖의 박물관으로는 조선 시대 선잠제를 기념하고 보존하고자 설립된 성북선잠박물관, 동권도와 혼천시계 등 여러 국보와 보물을 보유한 고려대학교 박물관, 대동여지도를 포함해 고지도를 전문으로 전시한 성신여대 박물관, 여성의 삶을 조망하는 유물들로 구성된 동덕여대 박물관이 있어요.
이처럼 성북구는 발길이 닿는 곳마다 역사와 문화가 존재하는, 과거와 현재가 함께 어우러진 활기찬 지역이에요. 조선 시대 문인 유한준이 남긴 말 중 이런 말이 있어요. “알면 알수록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참으로 보게 된다.” 이번 기회에 성북구 로드메이커를 통해 우리 동네 성북구를 알고, 사랑하고, 진정으로 바라보는 계기를 가지면 어떨까요?
한양도성은 조선 시대에 수도 한성부를 둘러싼 네 개의 산(백악산, 인왕산, 낙산, 남산)을 따라 쌓은 길이 약 18.6km의 성곽이에요. 한양도성에는 여러 개의 문이 있는데, 그중 4대문은 숭례문, 흥인지문, 돈의문, 숙정문이고, 4소문은 광희문, 혜화문, 소의문, 창의문이에요. 그리고 도성 밖으로 물길을 잇는 오간수문과 이간수문도 있지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은 어질고, 의롭고, 예의 바르고, 지혜롭고, 믿음직함을 뜻하는 한자어로, 조선이 나라의 기본 이념으로 삼은 중요한 덕목이에요. 한양도성을 지을 때, 인간이 갖춰야 할 덕목에 따라 ‘네 가지의 문’을 동서남북에 세우기로 했지요. 인간이 갖춰야 할 덕목을 4대문에 반영했어요.
동쪽 ‘흥인지문’의 ‘인(仁)’, 서쪽 ‘돈의문’의 ‘의(義)’ 남쪽 ‘숭례문’의 ‘예(禮)’, 북쪽 숙정문에서 ‘지(智)’를 찾을 수 있어요. 그렇다면 ‘신(信)’은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4대문 안 중앙에 있는 종각인 ‘보신(信)각’에서 찾아볼 수 있지요.
성문은 임금님이 능으로 행차하시거나 사신을 맞이할 때 큰 역할을 했어요.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성문의 역할은 바로 통로로서 안과 밖을 이어 주는 것이었지요. 가령, 성 밖의 물건을 성안으로 가져올 때를 생각해 볼 수 있어요. 도성 안에서 소비되는 물자는 대부분 성 밖에서 가져오는 것이었기 때문에 성문으로 우마차가 많이 드나들었어요. 상업이 발달한 19세기에는 매일 새벽에 숭례문과 흥인지문 밖에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우마차가 수백 대씩이었다고 하니, 정말 대단하지요?
한양도성은 최단 시간(4대문의 완성을 제외하면 약 98일)에 최다 인원(약 11만 명)이 동원되어 만들어진 성곽으로도 유명해요. 경상, 전라, 강원 등 각 지역에서 차출된 백성들은 태조5년(1396년) 음력 1월9일부터 2월28까지 49일간, 8월6일부터 9월24일까지 49일간 2회에 걸쳐 농번기와 혹서기, 혹한기는 피하고 농한기에 각 49일씩 총 98일 만에 4개의 산을 잇는 성곽을 쌓았어요.
일종의 부역이었기 때문에 임금을 받을 수도 없었고, 식사도 제공되지 않아 스스로 도시락을 준비해야 하는 힘든 일이었지요.
이렇게 고된 상황에서도 짧은 기간 안에 무사히 성을 완성할 수 있었던 첫 번째 이유는 많은 사람이 힘을 모아 함께했기 때문일 거예요. 변방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지역의 백성들이 동원되었으니까요. 그러니 한양도성은 한양만의 것이 아닌 모든 백성의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두 번째 이유는 바로 ‘실명제’예요. 성을 지을 때 자신이 책임진 부분에는 관직과 군명을 새겨 넣도록 한 것이지요. 이를 각자성석이라고 해요. 각자의 책임이 분명해졌으니 책임감을 느끼며 작업할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각자성석의 흔적은 지금도 성벽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답니다.
하지만 성벽이 무너지고 자리가 바뀌었다고 성벽과 성문에 담긴 이념이 사라진 건 아니에요. 또, 훼손을 안타까워한 사람들이 뜻을 모아 복원 사업을 시작했기 때문에 다행히 성벽과 성문이 조금씩 옛 모습을 되찾고 있지요. 복원 사업으로 성벽은 새롭게 단장된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있어요.
여러분은 어떤 신념으로 ‘나’를 만들어가고 있나요? 한양도성의 4대문을 신념을 담아 완성했듯 나를 어떤 신념으로 완성할지 생각해 보세요.
한양도성은 조선 시대에 수도 한성부를 둘러싼 네 개의 산(백악산, 인왕산, 낙산, 남산)을 따라 쌓은 길이 약 18.6km의 성곽이에요. 한양도성에는 여러 개의 문이 있는데, 그중 4대문은 숭례문, 흥인지문, 돈의문, 숙정문이고, 4소문은 광희문, 혜화문, 소의문, 창의문이에요. 그리고 도성 밖으로 물길을 잇는 오간수문과 이간수문도 있지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은 어질고, 의롭고, 예의 바르고, 지혜롭고, 믿음직함을 뜻하는 한자어로, 조선이 나라의 기본 이념으로 삼은 중요한 덕목이에요. 한양도성을 지을 때, 인간이 갖춰야 할 덕목에 따라 ‘네 가지의 문’을 동서남북에 세우기로 했지요. 인간이 갖춰야 할 덕목을 4대문에 반영했어요.
동쪽 ‘흥인지문’의 ‘인(仁)’, 서쪽 ‘돈의문’의 ‘의(義)’ 남쪽 ‘숭례문’의 ‘예(禮)’, 북쪽 숙정문에서 ‘지(智)’를 찾을 수 있어요. 그렇다면 ‘신(信)’은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4대문 안 중앙에 있는 종각인 ‘보신(信)각’에서 찾아볼 수 있지요.
성문은 임금님이 능으로 행차하시거나 사신을 맞이할 때 큰 역할을 했어요.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성문의 역할은 바로 통로로서 안과 밖을 이어 주는 것이었지요. 가령, 성 밖의 물건을 성안으로 가져올 때를 생각해 볼 수 있어요. 도성 안에서 소비되는 물자는 대부분 성 밖에서 가져오는 것이었기 때문에 성문으로 우마차가 많이 드나들었어요. 상업이 발달한 19세기에는 매일 새벽에 숭례문과 흥인지문 밖에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우마차가 수백 대씩이었다고 하니, 정말 대단하지요?
한양도성은 최단 시간(4대문의 완성을 제외하면 약 98일)에 최다 인원(약 11만 명)이 동원되어 만들어진 성곽으로도 유명해요. 경상, 전라, 강원 등 각 지역에서 차출된 백성들은 태조5년(1396년) 음력 1월9일부터 2월28까지 49일간, 8월6일부터 9월24일까지 49일간 2회에 걸쳐 농번기와 혹서기, 혹한기는 피하고 농한기에 각 49일씩 총 98일 만에 4개의 산을 잇는 성곽을 쌓았어요.
일종의 부역이었기 때문에 임금을 받을 수도 없었고, 식사도 제공되지 않아 스스로 도시락을 준비해야 하는 힘든 일이었지요.
이렇게 고된 상황에서도 짧은 기간 안에 무사히 성을 완성할 수 있었던 첫 번째 이유는 많은 사람이 힘을 모아 함께했기 때문일 거예요. 변방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지역의 백성들이 동원되었으니까요. 그러니 한양도성은 한양만의 것이 아닌 모든 백성의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두 번째 이유는 바로 ‘실명제’예요. 성을 지을 때 자신이 책임진 부분에는 관직과 군명을 새겨 넣도록 한 것이지요. 이를 각자성석이라고 해요. 각자의 책임이 분명해졌으니 책임감을 느끼며 작업할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각자성석의 흔적은 지금도 성벽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답니다.
하지만 성벽이 무너지고 자리가 바뀌었다고 성벽과 성문에 담긴 이념이 사라진 건 아니에요. 또, 훼손을 안타까워한 사람들이 뜻을 모아 복원 사업을 시작했기 때문에 다행히 성벽과 성문이 조금씩 옛 모습을 되찾고 있지요. 복원 사업으로 성벽은 새롭게 단장된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있어요.
여러분은 어떤 신념으로 ‘나’를 만들어가고 있나요? 한양도성의 4대문을 신념을 담아 완성했듯 나를 어떤 신념으로 완성할지 생각해 보세요.